동유럽 및 중유럽, 홀로코스트 연구 권위자로 꼽히는 티모시 스나이더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제시한 러우전 평화 협상 28개 항목 문서는 피해자인 우크라이나에 일방적 항복을 강요하고, 침략자에게만 모든 면죄부를 주는 러시아식 딕타트(항복 강요 문서)라고고 분석했다. / 사진 출처 - 티모시 스나이더 교수 서브스택 캡처 @ 프리덤조선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 티모시 스나이더(1969년생)는 동유럽·중유럽 현대사와 홀로코스트 연구의 권위자다.
11월 24일 그가 자신의 섭스택에 올린 장문의 비평은, 최근 공개된 트럼프 행정부의 ‘28개 항목 우크라이나 평화 각서’를 “평화안이 아니라 러시아식 딕타트(항복 강요 문서)”라고 규정했다.
스나이더의 진단은 간단하지만 무겁다. 주권을 확인한다는 선언으로 시작하지만, 실제 조항들은 우크라이나의 군사·헌법·동맹 선택권을 외부가 제한하고, 침략국 러시아의 철수나 책임을 요구하는 핵심 장치는 거의 비워 둔 채, 제재 해제와 경제적 보상만 상세히 적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 문서가 ‘전쟁을 끝내는 설계도’가 아니라 ‘침략을 정산하는 거래서’라는 그의 지적은 여러 매체의 분석과도 맞물린다.
더 흥미로운 장면은 미국 내 보수 진영에서 벌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의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멘토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공화당 전 하원의장 뉴트 깅리치가 친트럼프 매체 뉴스맥스와 자신의 소셜 계정(페이스북 등)을 통해 이 문서를 사실상 “항복 문서”라고 비판하며, “미국이 악에 맞서는 데 지쳤다고 해서 우크라이나인들의 용기와 도덕심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질타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멘토로 알려진 뉴트 깅리치 공화당 전 하원의장은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트럼프 대통령의 28개 항목 계획에 대해 신랄한 공개 비판과 우려를 표명했다. / 사진 = 뉴트 깅리 X 캡처
깅리치는 그동안 트럼프의 입장과 외교 노선을 옹호해온 핵심 원로 중 하나다. 그런 인물이 공개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용기’와 ‘도덕적 명분’을 언급하며 선을 그었다는 건, 이 평화안이 트럼프 지지 보수층 내부에서도 “러시아 편향”으로 읽히고 있음을 보여 준다.
실제로 깅리치는 올해 여러 글에서 우크라이나의 저항과 전쟁의 도덕적 성격을 강조해 왔고, 러시아에 과도한 양보가 될 수 있는 합의에 경계심을 드러냈다.
깅리치는 24일에도 다시 페이스북에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이를 정복하려는 독재자들을 다룸에 있어서 (평화를 핑계로 히틀러와 타협한 영국 수상) 체임벌린이 아니라, (히틀러에 맞서 싸우도록 영국인들의 용기를 이끌어 낸) 처칠을 배울 필요가 있다.(We need to study Churchill and not Chamberlain in dealing with Ukraine and the dictatorial who would conquer it.)라는 글을 올리며, 거듭 평화에만 집착하다가 더 큰 재앙에 직면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논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워싱턴에서는 상원의원들의 공개 문제제기 이후, 마르코 루비오 현 국무장관이 이 문서가 “러시아 측 안(案)”임을 인정했다가 파장이 커지자, “미국의 입장과 우크라이나가 사전에 동의한 원칙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라고 해명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루비오는 실제로 트럼프에 의해 국무장관이자 국가안보보좌관 대행을 겸임하고 있는 핵심 외교안보 라인으로, 이 평화안의 성격을 둘러싼 그의 발언 변화는 곧바로 ‘문서의 기원’ 문제로 번졌다.
미국이 러시아와 비공개로 28개 조항을 조율해왔다는 보도, 그리고 유럽·우크라이나가 “당사자 배제 상태에서 만든 안은 수용할 수 없다”고 반발하는 흐름 속에서, 루비오의 ‘러시아안 인정 → 미국안 재규정’ 해명은 오히려 의혹을 증폭시키는 모양새다.
핵심은 결국 하나다.
스나이더의 표현대로, 이 문서는 평화협정이라기보다 전쟁의 원인과 책임을 지우는 방식으로 전후 질서를 재단하려는 시도다.
러시아군 철수·점령 해제·민간인 공격 중단·전쟁범죄 책임 같은 ‘전쟁 종식의 본문’은 희미한데, 우크라이나의 군사력 제한, NATO 가입 봉쇄, 점령지의 ‘사실상 인정’, 제재 해제와 러시아 경제 재통합, 동결 자산 재배분은 구체적이다.
이런 비대칭은 전쟁을 멈추는 평화가 아니라, 침략을 “보상 가능한 선택지”로 만드는 위험한 선례가 된다.
때문에 깅리치의 경고는 특히 의미심장하다.
트럼프 진영 원로가 “악에 맞서는 데 지친 미국”이라는 자기반성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용기와 도덕심을 희생시키지 말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정책 비판을 넘어 보수 외교의 오래된 전통, 즉 침략에 대한 비인정, 자유국가의 자기결정권을 환기시키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평화는 피로의 언어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침략이 이익으로 환산되는 순간, 다음 전쟁은 ‘가능한 옵션’이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빠른 합의’가 아니라 ‘정당한 합의’다.
당사자인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배제된 평화는 지속될 수 없고, 침략국이 사실상 보상받는 합의는 국제질서를 무너뜨린다. 스나이더가 역사에서 끌어낸 경고와, 깅리치가 보수의 언어로 던진 경고가 같은 지점을 가리키는 이유다.
“평화”라는 단어가 다시 침략적 제국주의 수사로 오염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문서의 미사여구가 아닌 권력의 방향과 책임의 구조를 먼저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