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 평양공동선언 7주년 기념식 사진. 문재인 전 대통령 부부가 지난 9월19일 경기도 파주 캠프 그리브스에서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남북군사합의 7주년 기념식 및 2025 한반도 평화주간 개막식에서 김동연 경기도지사, 임동원·이재정·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등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엑스(X, 구 트위터) 캡처


2025년 통일부 조직 개편은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정권화’라는 더 정확한 단어가 떠오른다.

남북 교류와 협력 기능이 복원된다는 표면적 변화 뒤에는 북한 인권 조직의 폐지라는 구조적 침묵이 자리하고 있다.

본 칼럼은 기사 속 문장을 인용하며 그 언어가 덮고 있는 윤리적 공백을 드러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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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인도실 폐지…1국 1실에 ‘평화’ 표현 추가 등 대북 유화 기조 반영”

이 문장은 ‘평화’라는 단어를 전략적으로 배치하며 인권 조직의 폐지를 유화적 기조로 포장한다.

그러나 평화는 단어로 성립되지 않는다. 평화는 협정의 서명이나 회담의 사진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침묵 속에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을 복원하고 그들의 고통에 응답하는 구조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평화는 협정이 아니라 증언의 공간이다. 평화는 침묵을 구조화하는 기술에 대한 윤리적 응답이다.” (나의 테드 토크 중에서)

엑스(X, 구 트위터) 캡처


◆ 평화 협정 뒤 숨겨진 인권의 침묵

우리는 뮌헨 협정을 기억한다.

그 협정이 가져온 것은 전쟁이었다. 그러나 문재인과 김정은이 맺은 2018년 9월 평양공동선언, 즉 평화 협정은 기억하지 않는다.

그 협정 이후 2019년 판문점을 통해 강제북송된 탈북자들, 서해 바다에서 북한군에 의해 화형당해 사망한 한국 공무원, 그리고 여전히 북한에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은 한국인 목사들의 존재는 그 협정이 가져온 ‘평화’의 실체를 묻는다.

가자지구에서 평화협정이 이루어지며 인질이 석방되는 모습은 어제의 실제적 평화협정 소식이다. 하지만 한국은 평화협정이 이루어진 지 7년이 넘었지만 국민은 석방되지 못하고 강제북송되고 있는 현실이다.

평화는 정치적 이미지가 아니라 역사의 기억을, 생존자들의 기록을 지우지 않는 태도다.

평화는 침묵을 강요하지 않고 증언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다.

‘평화’라는 단어가 조직 개편의 키워드로 반복될수록, 우리는 그 단어가 무엇을 덮고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사람들은 전쟁을 총과 폭탄이 터지는 장소로 기억하지만, 21세기 전체주의 독재정권은 다양한 언어로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일상을 파괴하면서 평화를 외치기에 더더욱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참전용사들이 말하던 평화는 담배 한 모금 들이마시던 순간이라고 했다.

그렇게 평화는 싸우지 않으면 실제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지만 한국은 평화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엑스(X, 구 트위터) 캡처


◆ 인권 폐지와 비윤리적 정치

“개성공단 재개 현실성 떨어지는데 전담 부서 개설…‘개성 동영’ 의지 반영”

이 문장은 ‘현실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현실을 말하지 않는다.

개성공단의 폐쇄는 한국 정부가 아닌 북한의 결정이었다.

이후 북한은 공단 내 한국측 시설을 무단으로 가동하며 남겨진 한국 기업의 자산과 물품을 임의로 사용해왔다.

북한은 근로자들의 임금을 북한 화폐가 아닌 달러로 요구했고, 그 임금은 개인에게 직접 지급되지 않고 국가가 전액 수령했다. 이는 국제 노동 기준을 위반한 국가적 착취 구조이며, 일부 외화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 자금으로 전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조직 개편에서 개성공단 관련 부서를 부활시키는 것은 현실적 재개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정치적 회고와 상징적 집착에 가까운 결정이다.

북한은 이미 공단을 자체적으로 재가동하고 있으며, 지난 2020년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개성공단의 ‘부활’을 위한 전담 조직 신설은 현실성 없는 예산 낭비이며 윤리적 책임 회피로 읽힐 수밖에 없다.

‘개성 동영’이라는 정치적 상징은 윤리적 현실을 대체할 수 없다.

공단 재개는 단순한 행정 복원이 아니라 북한의 인권·노동 착취 구조에 대한 윤리적 검토와 국제적 책임을 전제로 해야 한다.

엑스(X, 구 트위터) 캡처


“북한인권센터의 입찰을 보류, 북한인권보고서 발간을 중단”

이 문장은 단순한 행정 조정처럼 보이지만 실은 증언의 공간을 폐쇄하는 결정이다.

국립북한인권센터는 윤석열 정부 시절, 26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서울 마곡동에 건립 예정이었던 공공기억의 장소였다.

이 센터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북한판 홀로코스트 박물관으로 불리며 고문, 강제노동, 종교 탄압, 납북자, 억류자, 국군포로, 강제북송 탈북민 등 침묵된 고통을 기록하고 전시할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재명 정부는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추진단을 해체하고 센터 명칭을 ‘한반도평화교류센터’로 변경하며 설계까지 수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는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다. 역사적 기억의 방향을 바꾸는 정치적 개입이다.

피해자의 증언을 기록하던 공간이 ‘교류’라는 이름 아래 침묵과 상징으로 대체된다.

교류라는 이름 아래 북한 정권의 범죄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일제 식민지 하의 인권유린도 교류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범죄행위도 모두 교류라고 불러야 되지 않는가?

더 심각한 것은 북한인권법에 따라 매년 국회에 보고해야 하는 ‘북한인권 증진 추진 현황’ 자료의 분량이 대폭 축소되고 공개 발간되던 보고서가 비공개로 전환된 점이다.

이는 단지 문서의 축소가 아니다. 국가가 침묵을 선택했다는 선언이다.

“윤리란, 사라진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기술이 침묵을 구조화할 때, 우리는 그 침묵을 해체하는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나의 테드 토크 중에서)

북한인권센터의 폐지와 보고서의 비공개는, 그 언어를 지우는 행위다.

그것은 고통을 외면한 평화이며, 증언을 삭제한 협정이요, 침묵을 제도화한 행정이자 굴욕의 정치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장면.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 2020년 6월17일 2면에 개성의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 현장을 공개했다. / 사진=엑스(X, 구 트위터) 캡처


◆ 남북 두 국가론...헌법의 침묵을 강요하는 정치적 기만

최근 통일부 조직 개편과 함께 은근히 제기되는 ‘남북 두 국가론’은 단순한 현실 인식이 아니라 헌법적 책임의 포기이며 윤리적 침묵의 제도화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명시하며, 북한 주민 역시 대한민국 국민으로 보호받아야 할 존재임을 선언한다.

탈북자들이 제3국을 거쳐 한국으로 오는 이유는 단순한 망명이 아니라 헌법상 귀환의 권리 때문이다.

그들은 ‘외국인’이 아니라 억압된 국민이며, 한국 정부는 그들을 보호할 법적·윤리적 책임을 지닌다. 그런데 남북을 별개의 국가로 인정하는 ‘두 국가론’은 이 책임을 구조적으로 부정한다.

“중국이 탈북자를 강제북송해도, 한국은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두 국가론이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윤리적 공백이다.

남북 두 국가론은 국가론이 아니라 북한 주민과 탈북자들의 인권 박해를 방조하겠다는 정치적 선언이다. 그것은 헌법 제3조의 공동체적 약속을 폐기하고, 강제북송된 탈북자들의 생명을 외면하며, 북한 내 억류된 한국인들의 존재를 침묵시키며, 분단의 희생자들을 ‘타국민’으로 분류하는 비윤리적 구조를 정당화한다.

“윤리란, 사라진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헌법이 침묵을 강요할 때, 우리는 그 침묵을 해체하는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나의 테드 토크 중에서)

남북 두 국가론은 그 언어를 지우는 시도다.

그것은 통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사진=엑스(X, 구 트위터)


◆ 윤리적 태도와 인권의 보편성

필자는 요즘 “윤리적”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그것은 단지 도덕적 판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윤리적 태도란 침묵을 구조화한 시스템에 질문을 던지는 용기이며, 피해자의 증언을 공적 기억으로 전환하려는 실천이며, 기술과 정책의 효율성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의 존엄을 복원하려는 철학적 약속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은 단순한 노동 착취 이치를 가르치지 않는다. 두 발로 걷는 것을 적으로 간주하던 그들이 두 발로 걷는 것이 좋다고 한 이야기, 그들이 순화시킨 언어가 평등하고 평화롭다는 의미가 아니라 윤리적 도덕과 책임을 제거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걷는 방식은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고통에 응답하는 방식은 끝내 배우지 못한 자들임을 강조한다.

윤리적 태도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보다 “무엇을 외면하지 않을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그것은 협정 문구가 아니라 사라진 자들을 향한 응답이다.

북한 인권 조직의 폐지는 단지 하나의 부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증언의 공간이 사라진 것이다.

인권은 정권의 입맛에 따라 조정될 수 있는 정책 항목이 아니다.

인권은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권리다. 그것은 국경을 넘고, 체제를 넘고, 침묵을 넘는다.

인권을 폐지하고 평화를 말하는 것은 고통을 외면한 평화이며 침묵을 강요한 협정이다.
우리는 그런 평화를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협정을 따르지 않는다.

‘정상화’라는 이름 아래 복원되어야 할 것은 단지 회담과 교류 기능이 아니다.

복원되어야 할 것은 피해자의 증언을 기록하고 기억을 보존하며 윤리적 책임을 다하는 국가의 자세이다.

박지현 아시아 태평양 전략센터 연구원

박지현

​· 아시아 태평양 전략센터 인간안보 연구원

· 스페인 마드리드 프란치스코 빅토리아 대학교 동아시아 연구원

· 영국 지방의회 후보자

· 징검다리 공동대표

· <가려진 세계를 넘어> (2022 세종 우수도서) 저자 / <The Hard Road Out> (영문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