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9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UN 제4차 세계여성회의 회의장 모습.사진=인터넷 캡처
1995년, 세계 180여 개국이 베이징에 모여 '여성의 권리는 곧 인권'임을 천명한 '베이징 선언'(Beijing Declaration)과 행동강령(Platform for Action)을 채택했다.
여성에 대한 폭력 근절, 교육과 보건의 권리 보장,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의 평등 참여를 약속한 이 선언은 여성 권리를 위한 가장 포괄적이고 진보적인 국제 합의였다.
오랜 세월 전쟁, 빈곤, 가부장제, 국가 폭력 속에서 침묵당한 여성들의 고통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국제사회의 보편적 의무를 담은 메시지였다.
그러나 베이징 선언이 채택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 북한 여성과 여아들의 현실은 여전히 선언이 겨냥했던 폭력과 착취, 차별 속에 갇혀 있다.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는 북한에서 자행되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인권 유린을 "인도에 반한 죄"(crimes against humanity)로 규정하며 국제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특히 여성들의 성폭력, 강제낙태, 강제노동, 정치범수용소 내 모성권 박탈 문제는 북한 인권 범죄의 핵심으로 지목되었다.
보고서 발표 직후 북한은 이에 반발하며 사상 처음으로 여성 인권 보고서를 내놓았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변화가 아니라 국제사회의 비판을 무마하기 위한 정치적 방패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 북한 여성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억압과 착취 양상은 더 교묘해지고 잔혹해졌다.
◆ 국가 선전의 도구로 전락한 여성, 끔찍한 착취의 현실
북한 여성들은 지금도 국가 차원의 구조적 박해 속에 살고 있다.
북한 헌법과 법률은 남녀평등과 여성 권리 보장을 주장하지만, 실제로 여성은 국가 선전의 도구일 뿐, '평등'은 종이 위의 약속에 불과하다.
북한 당국은 여성들을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라고 칭하며, 여성의 존재를 국가 혁명과 출산의 기능에 종속시킨다.
어머니 대회를 통해 여성들은 아이를 많이 낳아 국가에 이바지해야 하는 역할만 강조된다. 이는 여성의 인간적 존엄을 무시하고, 국가가 여성의 몸과 생명을 관리·통제하는 명백한 인권 침해다.
북한 정권이 만든 노래 "여성은 꽃"은 얼핏 여성 존중을 표방하는 듯 보이다. 그러나 실상은 여성의 개별적 권리와 정체성을 무시하고, 국가가 규정한 이미지 속 존재로 축소시키는 문화적 폭력이다.
특히 심각한 것은 '5과 조직'이다.
북한 5과 조직은 김씨 일가를 위해 복무하는 기관으로, 부모들에게 자녀들을 강제적으로 국가에 바치도록 한다.
17세 이상 여아들이 가는 5과는 독재자와 엘리트들을 위해 춤과 노래, 심지어 몸까지 팔아야 하는 일종의 국가적 인신매매다.
여아들 스스로 결단할 수 있는 길은 없고, 국가가 여성들의 모든 신체적, 정신적 통제권을 갖는다.
여기 들어간 여아들은 국가가 정해주는 대로 강제 결혼도 해야 한다. 이는 또 다른 문화 폭력이다.
한 마디로 '5과 업무'란 최고지도자에 대한 성적, 신체적 봉사를 강요당하는 노예 업무인 것이다.
해외 파견 여성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춤과 노래를 강요당하며 외화를 벌어야 한다. 이 역시 국가 차원의 일종의 인신매매와 다름없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한 남편이 사망한 경우, 그 아내들은 사회적 낙인과 차별 속에 방치되며 국가에 의해 그들의 모든 말과 행동은 감시를 받게 된다.
또한, 중국 내 인신매매와 성매매 시장에 노출된 탈북 여성들은 중국 당국의 비협조로 강제북송되어 구금, 고문, 강제노동, 성폭력 등 심각한 인권유린을 경험한다.
어린 자녀를 데리고 중국 내 대사관으로 진입을 시도하다가 공안의 저지에 붙잡혀 절규하는 한 탈북여성과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며 우는 어린 딸. 이렇게 붙잡힌 탈북여성은 강제북송되어 모진 고초를 겪어야 한다. 중국은 유엔상임이사국임에도 강제송환금지원칙을 지키지 않고 있다.
이 모든 현실은 단순한 개인의 불행이 아니다. 국가와 체제가 구조적으로 만든 인권 유린이다. 헌법이나 노래, 대회 이름 속의 '상징적 존중'은 북한 여성의 삶과 존엄을 보호하지 않으며, 오히려 국가의 통제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행동 촉구..."공허한 선언을 넘어선 정의 실현"
이처럼 북한 여성이 처한 모든 현실은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여성 인권 유린임에도, 지난 10년간 국제사회의 대응은 선언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베이징 선언 30주년을 맞이해도 북한 여성과 여아들의 권리는 여전히 보호받지 못하고, 국제사회의 약속은 현실에서 살아 숨 쉬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국제사회가 다음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탈북 여성과 소녀들이 인신매매와 강제노동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무엇을 했는가?
무국적 아동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실질적 행동이 있었는가?
북한 내부에서 조직적으로 벌어지는 성 착취와 여성 탄압을 막기 위해 국제사회는 어떤 조치를 취했는가?
러시아 전쟁에 참전한 군인의 미망인 여성들이 겪는 차별을 왜 외면하는가?
"저는 인신매매와 강제결혼으로 고통받았던 북한 출신 생존자입니다. 저의 경험은 국가, 비정부기구, 그리고 인권 활동가들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안타깝게도 저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중국에서 북한 여성과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성매매는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만연하고, 복잡하며, 훨씬 더 가까이에 있습니다." - 박지현 (영국 엠네스티 인권상 수상자)
1. 유엔 여성기구 개입 및 CEDAW 적용 강화
국제사회는 UN 여성기구(UN Women), 국제 여성 NGO, 그리고 각국의 여성 인권 단체들이 탈북 여성과 여아 문제를 의제의 중심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특히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 Convention on the Elimination of All Forms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을 적극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CEDAW는 국가별 여성 차별 실태를 점검하고, 정책 개선과 권리 보장을 권고하는 역할을 하지만, 북한은 공식적인 보고와 투명한 참여가 제한되어 있다. 이에 탈북 여성 지원과 여성 권리 증진 활동은 CEDAW를 포함한 국제 여성 철폐 조직과 연계된 구조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글로벌 허브(UN Women, CEDAW), 지역 네트워크(각국 여성 NGO), 현장 지원팀(탈북 여성 상담, 법률 지원, 교육), 연구 및 정책분석팀(실태 조사, 정책 제안)의 다층적 연계를 통해 북한 여성 인권 의제를 국제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정책 변화를 촉진해야 한다.
2. 무국적 아동 보호와 국제법 적용 강화
탈북 여성들 사이에서 태어난 무국적 아동들은 교육, 보건 등 기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아동권리협약(CRC, 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과 무국적자 보호협약(Convention relating to the Status of Stateless Persons)을 적극적으로 적용하여 이들의 생존권과 발달권, 사회적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유엔 난민기구(UNHCR)와 국제 NGO, 지역사회 기반 단체들은 협력하여 무국적 아동 등록, 교육, 의료, 심리·사회적 보호 등 포괄적 지원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3. R2P(보호책임) 원칙의 적용 논의
국제사회는 2005년 유엔 정상회의에서 합의한 R2P 원칙(Responsibility to Protect, 보호책임)을 북한 여성 문제에 적용해야 한다. 이 원칙은 국가가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조직적 학대·박해를 가할 경우, 국제사회가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 여성과 여아가 겪는 인신매매, 성착취, 강제북송, 무국적 아동 문제는 R2P가 겨냥한 전형적인 상황이다. R2P 원칙을 적용하면, 국제사회는 선언적 권고를 넘어 인도적 지원, 난민 보호, 국제법적 압박, 제재·모니터링 강화 등의 실질적 행동을 논의하고 실행할 수 있다.
4. 중국에 대한 국제적 압력 강화
중국은 국제법상 난민 보호 의무를 규정한 1951년 난민협약(Refugee Convention)과 1967년 난민의정서를 무시하며 탈북 여성과 아동을 강제북송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UN 인권이사회, 국제기구, 다자 회의에서 중국의 강제북송 문제를 공개적으로 지적하고 시정을 촉구해야 한다. 난민보호 의무 위반 사례를 국제인권위원회와 UNHCR에 보고하고, 글로벌 NGO 네트워크와 언론을 통해 사례를 공개하며, 필요시 제재 수단을 검토하는 등 다층적 압력을 강화해야 한다.
5. 인간안보(Human Security) 관점에서의 보호
1994년 유엔개발계획(UNDP) 인간개발보고서에서 제시된 인간안보 개념은 개인과 공동체가 직면한 생존, 자유, 권리, 삶의 질 위협에 주목한다. 북한 여성과 여아가 직면한 복합적 위험은 전통적 국가 안보 관점으로는 보호하기 어렵다. 인간안보 관점에서의 대응은 성폭력, 인신매매로부터의 생명 보호, 교육·건강 등 권리 보장, 지역사회 내 안전한 사회적 안정, 직업 교육을 통한 경제적 자립을 목표로 한다. 이는 기존 국제 규범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단순한 인도적 지원을 넘어, 권리 기반의 지속 가능한 보호 체계를 구축하는 전략적 접근이다.
6. ICC 제소를 포함한 국제형사 사법 책임 추궁
2014년 COI 보고서는 북한 지도부와 정치권력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할 것을 권고했고, 유엔 총회도 이를 지지했지만 중국과 러시아가 안보리 결정을 막고 있다.
하지만 ICC는 로마 규정(Rome Statute) 제7조에서 성폭력, 성적 노예화, 강제매춘, 강제임신 등 성폭력 범죄를 "인도에 반한 죄"로 규정하고 있으며, 최근 정책 강화를 통해 지도자와 국가기구에 대한 책임 추궁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김정은 정권 및 중국 일부 관련자들에 대한 ICC 제소는 정의 실현의 필수적 수단이며, 국제사회가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실천적 선언이 될 수 있다.
북한 내 여성 및 여아의 인권 상황에 관한 국제회의
엘리자베스 살몬 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은 향후 몇 달간 북한 내 여성과 여아의 인권 상황을 우선해서 살펴보겠다고 밝혔다. 지난 2023년 1월31일 서울 유엔인권사무소에 따르면 살몬 특별보고관은 전날부터 양일간 서울에서 열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여성 및 여아의 인권 상황에 관한 국제회의'에 참석한 뒤 관련 문제에 대해 "북한과 협력할 의지가 분명하며 준비가 됐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 사진=엑스 캡처
◆ 행동 없는 선언은 공허하다..."국제사회의 책무"
베이징 선언이 채택된 지 30년이 지났다.
그러나 북한의 여성과 여아들은 여전히 보호받지 못한 채, 더 은밀하고 구조적인 방식으로 착취당하고 있다.
국제사회가 침묵한다면, 역사는 우리 모두를 공범으로 기록할 것이다.
최근 들어 ‘양성평등’이라는 용어는 점차 ‘젠더 이슈’나 ‘성평등 문제’로 대체되고 있다.
물론 이는 포괄성과 다양성을 반영하려는 시대적 흐름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언어의 변화가 여성 인권의 현실적 문제를 직시하려는 사회적 태도를 흐리게 만들고 있다고 느낀다.
단어 하나가 개인의 운명과 보편적 권리를 훼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간과한다. 특히 북한 여성의 문제가 ‘젠더 담론’이라는 추상적 틀 속에 희석되며, 국제적 논의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현실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다.
우리는 선언과 정책의 문구를 반복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실질적인 행동과 보호를 통해 이 여성들의 삶을 지켜야 하며, 국제사회 역시 더 이상 새로운 선언이 아닌, 행동으로 약속을 지켜야 할 마지막 기회를 맞고 있다.
북한의 여성과 여아들은 더 이상 거래되는 상품도, 무국적의 그림자도, 정권의 성적 유린 대상도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존엄한 인간이며, 그 존엄을 지키는 일은 국제사회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선언이 아니라 행동이다"
"침묵은 공범이고, 외면은 또 다른 폭력이다"
- 글쓴이
박지현
· 아시아 태평양 전략센터 인간안보 연구원
· 스페인 마드리드 프란치스코 빅토리아 대학교 동아시아 연구원
· 영국 지방의회 후보자
· 징검다리 공동대표
- 칼럼 정리
고철혁 / 프리덤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