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기획] 영국의 북한 인권 운동가 ① : 2020년 영국 앰네스티 인권상 수상자 박지현 씨, "나는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 영국에서 자유의 소중함 온몸으로 체험"
2025년은 광복 80주년이자, 한반도 장기 분단 70년이 되는 해다. 그러나 여전히 분단의 벽을 허물 돌파구는 보이지 않는다. 북한은 2023년 말부터 소위 '적대적 2국가론'을 들고나오며 기존까지의 민족 통일 노선을 전면 폐기하고, 분단 고착화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비록 적화 통일이라도 분단된 민족을 기어코 통일해야 한다는 김일성 유훈마저 저버린 것이다.
프리덤 조선은 이념과 체제 차이로 갈라진 남북의 영구 분단을 주장하는 적대적 2국가론에 반대한다. 북한 2500만 동포 역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보장되는 선진화된 체제에서 자유와 인권, 번영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이미 고령화되어 상당수가 고인이 된 이산가족 외에도 분단으로 인한 각종 기회비용은 너무나 크다.
김정은 정권이 영구 분단 적대적 2국가론을 들고나온 배경에는 그 체제가 수십 년간 자행한 참혹한 인권 말살 범죄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특히 탈북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북한 실상과 탈북 이후 북한 동포들이 겪어야 했던 인권 유린은 실로 경악할 수준이다. 아무리 부정하고 외면해도 진실은 변하지 않으며, 이에 대해 책임져야 할 시간은 시시각각 다가올 것이다.
20세기 말 공산주의 자체 모순으로 인해 구소련 등 동구권 몰락 속에 북한 역시 공산주의 배급 체제가 붕괴했고, 최저 수십만 명에서 최대 300만 명대로 추산되는 주민들이 굶어죽는 끔찍한 비극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북한 주민이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넘었다. 이들은 중국에서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늘 쫓기며 불안정한 삶을 살아야 했다. 특히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된 탈북자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많은 이들이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과 모진 처우 끝에 목숨을 잃었지만, 살아나 석방된 이들은 다시 중국으로 탈출했다.
그중 약 3만여 명은 대한민국으로 탈출했고, 현재 한국에 정착해 성공한 경우도 많다. 제3국 행을 택한 탈북자들도 있다. 한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탈북자가 정착한 나라는 영국이다. 2025년 현재 영국 정착 탈북자는 약 700명 전후라 하지만, 2세를 포함하면 최대 1000명대에 육박한다는 분석도 있다.
북한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은 한국행을 택해도 정착까지 여러 시행착오를 겪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영국행을 택한 탈북자들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북한에서는 영어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니 영국 정착 탈북자들은 체제만이 아니라 언어, 피부색, 문화 모두가 낯선 환경에서 제2의 삶을 시작한 셈이다.
이들 역시 일종의 한인 디아스포라 일원이며, 장차 한반도 분단을 해소하고 통일로 나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함께 해야 할 동포다. 우리는 더 늦지 않게 영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의 삶을 돌아보고,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프리덤 조선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 하에 올해 8월 초, 영국에 정착한 탈북자 중 맨체스터의 박지현 씨를 만나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2026년 맨체스터 무어사이드 선거에 보수당 후보로 의원직에 도전하는 박지현 씨.
박 씨는 영국 정착 탈북자들에게 영어를 교육하는 등 정착을 돕는 활동을 적극 전개했다. 또 영국과 유럽에서 거의 관심을 두지 않던 북한의 실상 및 재중 탈북 여성들의 참혹한 인권 유린 실태에 대해 증언하는 등 인권 활동에 힘쓴 공로로 2020년 영국 국제 앰네스티 인권상을 수상했다. 또 2021년 탈북민 최초로 영국 지방 의회 선거에 출마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 씨는 또한 7개 국어로 번역된 <가려진 세계를 넘어> (박지현, 채세린 공저, 도서출판 슬로비. 2021년 한국어판 출간. 영어 제목은 <The Hard Road Out>)의 저자다. 프랑스 문화부 장관 출신 플뢰르 펠르랭 씨를 비롯해 영국 외무 장관 라미, 상원 의원 앨튼 경 등 많은 인사가 박 씨 저서를 읽고 적극 추천할 정도로 서구에서 반향이 컸다.
2025년 현재에도 영국과 미국, 유럽 언론 및 대학, 연구소 등에서 저명한 한반도 전문가들과 함께 북한 연구를 진행하는 한편 국제 인권 운동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박 씨의 인터뷰는 앞으로 몇 회에 걸쳐 나누어 게재할 예정이다.
- 편집국
Q. 박지현 씨의 영국과 유럽에 북한 인권 활동이 인상적입니다. 몇 년 전 출간되어 여러 언어로 번역된 진솔한 수기 <가려진 세계를 넘어 (The Hard Road Out)>가 영어권 국가들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되며, 용기를 내어 증언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영국이나 유럽 언론, 또 RFA 등에서 먼저 박지현 씨 소식이 많이 보도되었고, 한국 언론에서는 탈북자 최초로 영국 의회 선거에 도전하며 조선일보 등에서 소개되었습니다. 이번에 프리덤 조선에서 영국 정착 탈북 사회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첫 번째로 박지현 님의 활동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선 지현 씨가 탈북을 결심한 결정적 계기와 시기가 궁금합니다. 자서전과 인터뷰를 통해 많이 알려졌지만, 프리덤 조선 독자들을 위해 다시 한번 말씀 부탁드립니다.
박 :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께 제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저는 함경북도 청진시 라남구역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탈북한 시기는 북한 전역에서 주민들이 대량으로 굶어 죽던 시기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를 ‘고난의 행군’이라 부르지만, 저는 그 표현 대신 ‘국가에 의한 집단 대량학살’이라고 규정합니다. ‘고난의 행군’이라는 단어는 마치 자연재해로 인한 단순한 흉작 때문에 사람들이 죽었다는 식으로 국가의 책임을 흐리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굶주림에 놓여 있었지만, 저의 탈북 동기는 생존을 넘어선 절박한 가족의 외침이었습니다. 당시 군부에서 쫓기고 있던 제 남동생을 살려달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 저를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목숨을 걸고 탈북했지만, 남동생은 중국에서 강제북송되어 끝내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고, 저는 인신매매로 팔려가 중국 농촌에서 6년간 살았습니다.
결국 2004년, 저 역시 체포되어 강제북송 당했고, 다시 지옥 같은 북한으로 끌려갔습니다.
두 번째 탈북은 저에게 마지막 희망이자 결단이었습니다. 중국에 홀로 남겨진, 저의 유일한 가족인 어린 아들을 더 이상 잃을 수 없다는 생각이 저를 다시 죽음의 강을 건너게 했고, 결국 그 결심이 저를 살려냈습니다.
Q. 탈북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 혹은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다면 무엇입니까?
박 : 처음 탈북은 온성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청진에서 살았지만, 중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에는 봄과 가을마다 온성, 종성, 샛별 쪽으로 농촌 동원을 자주 다녀서 그 지역의 지형은 익숙했습니다.
하지만 새벽에 두만강을 건넌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극한의 공포였습니다. 두만강 위에 섰던 그 순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제대로 걷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움직였고, 등 뒤에서 총성이 울렸을 때 온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두 번째 탈북은 무산 지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때는 브로커가 있었지만, 제 왼쪽 다리는 인간이 도저히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저는 비닐로 다리를 감고 그 위에 신발을 신은 뒤, 신발 끈으로 단단히 묶고 새벽 2시부터 밤 9시까지 단 한 번도 자리에 앉지 않고 산길을 걸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한 번 앉으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 중국에 홀로 남겨진 제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저는 넘어질 수 없었고, 멈출 수도 없었습니다.
힘든 과정이 무엇이었냐고 물으셨지만, 사실 가장 큰 고통은 '가족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자체였습니다. 그 고통은 지금도 제 가슴 깊은 곳에 묻혀 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두 번째 탈북 당시 퉁퉁 붓고 망가진 다리를 비닐로 감싸고 새벽 2시부터 밤 9시까지 한 번도 앉지 않고 산길 걸어 탈출
가장 큰 고통은 '가족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 자체, 그 고통은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 묻혀 있어
Q. 한국이 아니라 굳이 영국을 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울러 영국 외에도 탈북자가 유럽 등의 국가로 가고 싶을 경우 현실적으로 얼마나 가능한지, 또 대략적으로라도 그 규모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는지요?
박 : 탈북자라면 누구나 한국으로 가고 싶어 합니다. 저 역시 다시 탈북한 후,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심양, 청도, 그리고 북경에 있는 한국 영사관과 대사관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를 증명할 수 있는 신분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북한 주민들은 여권조차 가질 수 없는 21세기의 '무국적자'입니다. 그러니 한국뿐 아니라, 어떤 나라 대사관에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떤 한국 분들은 다른 나라 난민이나 이민자들이 탈북자들보다 더 불쌍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과 탈북자들의 가장 큰 차이는 그들에게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여권'이 있지만, 진짜 북한 주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여권도, 국적도, 자유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프리덤 조선 독자 여러분, 이런 현실을 많은 분들이 알고 공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법적으로 세계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무국적자들입니다.
한국행이 실패한 뒤, 저는 몽골 울란바토르로 가기 위해 내몽골 국경을 넘기도 했지만, 그 또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북경에서 2년 동안 장사를 하며 숨어 지냈고, 그 시절은 제 인생에서 가장 불안하고 고립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 국적을 가진 목사님의 도움으로 북경 외곽에 위치한 유엔 난민기구(UNHCR) 사무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택권'을 가졌습니다. 그 선택이 저를 영국으로 인도했고, 그것이 바로 오늘날 날 제가 영국에 살게 된 이유입니다.
박 씨는 북한에서의 성장 및 탈북 과정을 진솔하게 기록한 수기 <The Hard Road Out> (박지현, 채세린 공저, 한국어판으로는 '가려진 세계를 넘어'라는 제목으로 출간)는 7개 국어로 번역되며 북한 현실 및 탈북자 인권에 대해 무관심하던 영국 및 유럽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프랑스 전 문화부 장관과 영국 외무 장관 등도 박 씨 수기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전했으며, 체코에서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은 소위 고난의 행군 시절을 거치며 양산된 무수한 재중 탈북 여성이 겪은 끔찍한 비극의 당사자이자 생존자의 경험을 생생하게 기록한 매우 중요한 사료다. 또한 공산 전체주의 체제가 강요한 극한 고통과 위기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도덕적 가치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삶을 이어가는 숱한 탈북 여성들의 용기와 지혜를 엿보게 해주는 감동적인 휴먼 스토리다.
Q. 영국에 정착할 때까지 가장 어려웠던 점과 영국에서 북한 인권을 알리는 활동을 하게 된 이유 혹은 계기는 무엇입니까?
박 : 영국 정착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언어’였습니다. 탈북자들은 무인도에 데려다 놔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전체주의 공산 정권을 견디어 낸 생존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저희에겐 천국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정착 과정에서 가장 큰 장벽은 '언어'였습니다.
중국에서는 공안과 북송을 피하기 위해 언어를 배웠습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단지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터전'을 읽고 살아가기 위한 가장 소중한 수단으로 영어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북한 인권을 알리는 활동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언어였습니다. 처음에는 한국어와 통역을 사용했지만, 한국 분들조차 북한 현실을 정확히 모르다 보니 통역에 많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같은 한글을 쓰는 사람들이지만, 북한 언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처음에는 참 낯설고 힘들었습니다.
또 하나 놀랐던 점은 제가 2008년 영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많은 영국인들이 한국과 북한을 구분하지 못하고, 한반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조차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대학교에서조차 한국학은 왜곡된 역사 위에 서 있었고, 북한에 대해 거의 무지한 상태였습니다. 한국전쟁에 직접 참여했던 일부 고령 참전 용사분들만이 그나마 한국과 북한을 조금 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충격은 저를 더욱 배움의 길로 밀어 넣었습니다. 저는 더 열심히 영어를 배우며, 한반도 역사를 영어로 다시 공부하며 저 자신을 성장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Q. 영국 지방 선거에 도전한 이유 특히 영국 보수당 후보로 출마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북한 인권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는 한국 보도 등을 봤는데, 현실적으로 영국 지방 의원 역할은 해당 지역 구민의 생활 향상 등에 집중될 것으로 생각되므로 그런 출마 이유가 오히려 마이너스는 아니었는지요? 지역 유권자 반응 및 출마 경험을 통해 배운 점 등 성과와 한계를 포함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박 : 한국 뉴스와는 인터뷰를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외신이 제 활동을 보도한 것을 가져가 쓰는 경우가 발생했고, 그래서 왜 제가 정치에 도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은 자주 생략되곤 했습니다.
물론 "북한 인권을 알리기 위해 정치에 나섰다"라는 말도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전해지면 마치 한국에 '배경 따지기 정치 문화'가 있는 것처럼, 제가 탈북자이기 때문에 공천을 받았다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후보자로 나서게 된 결정적 계기는 영국인들이 제게 해준 말 한마디 때문입니다.
코로나19 초기, 전 세계에서 영국이 가장 높은 사망자 수를 기록하던 시기였습니다. 너무 늦게 봉쇄에 들어간 탓에 사망자가 폭증했고, 병원에서 쓸 마스크조차 제대로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개인적으로 쌀과 라면을 사서 런던에 있는 탈북민들에게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계신 탈북민 한 분께서 무려 7,000장의 마스크를 무료로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그 마스크를 1,000장씩 나누어 형편이 가장 어려웠던 요양원들에 기부했습니다.
TV 뉴스에서는 매일같이 쏟아지는 사망자 소식, 가족조차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이야기가 전해졌고, 그 장면들은 저를 90년대 북한의 대량 아사 시절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길가에 쓰러진 시신들, 그 시신조차 수습할 가족이 없어 집단으로 매장되던 그 시절, 굶주림에 죽어가던 제 제자, 그리고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떠났던 아버지와 동생의 기억이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그런 저의 행동을 본 영국인 중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난민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를 돕고 있다."
그 말이 저에게 용기와 기회를 주었습니다.
사실 저는 정치에 뜻이 있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2017년 보수당에 가입은 했지만 그것은 제가 살아갈 길에 하나의 지팡이가 필요해서였을 뿐, 직접 정치에 뛰어들려는 목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영국인들의 말 한마디, 그리고 마침 찾아온 지역 선거 기회가 제가 용기를 내어 도전하게 만들었습니다.
처음 후보 등록을 했을 때는 누구도 제가 탈북자라는 것, 북한 인권 운동가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후보자로 등록되기 위해서는 경찰서를 통한 신원 조회부터 진행되는데, 저는 범죄 기록이 없었고 아이들도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의 지역 의원은 국회의원과 달리 지역 주민들을 위한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합니다. 저는 제가 그동안 해 온 활동이 지역 사회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선거에 나서며 오히려 제가 더 많은 배움을 얻었습니다.
영국에 살면서도 저는 늘 '난민'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지역 사회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들은 한 번도 저를 차별한 적이 없었고 오히려 우리가 그들을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정치에 참여하면서 '자유'란 무엇인가를 더 정확하게 알게 되었고, 저 자신이 이 사회에 당당히 녹아든 시민임을 느꼈습니다.
코로나19 당시 영국 요양원을 돌며 마스크를 나누어 주다가 '난민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를 돕고 있다.'는 말에 용기 내어 지역 정치 도전
그 전까지 '난민' 테두리에 갇혀 있었지만 지역 사회 안에서 활동하며 극복, 더 정확한 '자유'의 의미와 당당한 시민임을 자각
영국에 정착한 탈북자 박지현 씨가 2021년 3월 22일 영국 버리의 무어 사이드 구 지방 선거에서 보수당 후보 출마를 결정한 후 전단지를 돌리며 지역 주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 필 노블/로이터 제공(Phil Noble/Reuters)
지금은 지역 교육에 참여하며 보수당 정치인 자격으로 학교 이사를 맡고 있고, 학교 운영 전반에도 직접 참여해 배우고 있습니다. 두 달 전에는 지역 당 대회에서 대내외 협력 담당자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은 북과 남으로 나뉘어 있고,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유대인 커뮤니티, 무슬림, 기독교, 힌두교 등 다양한 문화가 공존합니다. 마치 한자리에서 전 세계를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 다름 속의 조화를 보며 저 역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유권자들이 저를 '탈북 난민'이 아닌 '영국 시민'으로 인식해 주는 것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또한 저를 통해 북한 현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는 반응을 들을 때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받습니다.
정치와 활동을 통해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때로는 목소리가 필요한 순간도 있지만, 행동이 더 절실한 순간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과거는 아픈 역사지만, 그 과거를 딛고 일어서는 제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유의 소중함, 오늘도 독재자들의 박해로 고통받는 이들의 현실, 그 모든 것에 눈을 감지 않도록 이끄는 일, 그것이야말로 생존자의 책임이란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저는 또한 영국 보수당 컨퍼런스에서 연설한 최초의 탈북자이기도 합니다.
Q. 현재 혹은 과거 영국에서 북한 인권 활동을 알리거나 재영 탈북자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 진행한 활동 및 계획이 궁금합니다. 보람 있었던 일이나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인지도 간략히 말씀 부탁드립니다.
박 : 제가 본격적으로 인권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12년부터입니다. 처음에는 영국인들과 함께 일하며 영어를 배우고, 서로의 문화를 익혀가던 그 시간이 너무도 소중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때 만났던 동료들은 영국에서 제가 처음으로 함께 일했던 직장 동료이자 평생 친구들이 되었고, 지금도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뿌듯하게 여기는 일 중 하나는 영국에 살고 있는 탈북민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 생각에서 출발하여 지금 런던에 있는 '커넥트 북한(Connect North Korea)'라는 단체를 현재의 대표와 함께 설립하고 성장시켰습니다.
처음에는 자원봉사 형태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제 목표는 명확했습니다. 펀딩을 확보한 후 탈북민들을 정식으로 고용하고, 저는 인권 운동가로 전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본격적으로 북한 인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정치도 배우고 활동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아시아 태평양 전략 센터(Center for Asia Pacific Strategy)'에서 인간 안보(Senior Fellow fir Human Security) 분야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란치스코 빅토리아 대학교(Francisco Victoria University) 산하 동아시아 센터에서도 연구원으로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저에게 하나하나 '나만의 게이트'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게이트들이 결국 저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지금도 북한 독재 정권과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2024년부터는 유럽, 영국, 한국에 거주하는 탈북민들과 한국인들이 함께 참여하는 온라인 글쓰기 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글쓰기 방의 시작은 단순했습니다. "메아리가 돌아오려면 먼저 소리를 내야 한다"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들, 말하지 못했던 아픔과 목소리들을 이제는 세상 밖으로 꺼내 말하고자 시작한 것입니다.
현재 순조롭게 운영되고 있고, 이제 곧 시작될 3기 프로그램에는 더 많은 참여자가 함께 할 수 있도록 준비 중입니다.
제가 걸어온 길은 어쩌면 평범한 이민자의 삶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확실한 방향이 있었습니다. 한 걸음씩, 내가 설 곳을 스스로 만들어가며 나를 사회에 녹여냈고, 그 과정은 단지 적응이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는 징검다리 확산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징검다리는 지금도 인권, 교육, 정치, 시민사회로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Q. 영국에서 북한 인권 운동가로 활동하며 체감한 영국 언론이나 정치권, 일반인의 북한에 대한 관심과 지식 정도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공적 인생을 시작한 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을 꼽을 수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박 : 처음 영국에 도착했을 때 저는 그저 동양인 이웃 중 한 명으로 보였을 뿐이었습니다. 당시 영국 언론과 정치권, 그리고 일반 시민 대부분은 북한에 대해 깊은 이해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South Korea)과 '북한'(North Korea)은 구분조차 어려운 낯선 개념이었고, 북한 인권 문제는 뉴스 변두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그 시절 저처럼 생존자였던 탈북민들도 영어가 익숙하지 않다 보니 북한 현실을 제대로 알리는 데 큰 한계가 있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진실도 전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진실도 전달되지 않는다.
나에게 영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한 생존 수단이 아니다.
진실을 전하고, 기억을 공유하며, 자유를 확장하는 언어라는 무기를 갖는 것이다.
- 박지현(맨체스터)
그러나 2014년 유엔 북한 인권조사 위원회(COI) 보고서가 발표되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영어를 배우고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는 탈북민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이제는 다큐멘터리나 유튜브를 통해 북한 실상을 직접 증언하는 탈북자들을 영국에서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분명한 진전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들도 많습니다. 영국과 유럽 전반에는 지금도 친북 성향 활동가들과 학자들이 존재합니다. 특히 아카데믹 세계에서는 북한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여전히 통용되며, 이로 인해 한국 현대사조차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처럼 진실이 가려지는 현실은 저에게 언어를 넘어 역사와 담론을 바로 세우는 또 다른 과제를 던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어를 배운다는 것을 단순한 생존 수단이 아니라, 진실을 전하고, 기억을 공유하며, 자유를 확장시키는 언어의 무기로 삼았습니다'. 영국 역사도, 한국 역사도 함께 배우며 진실을 정리하고, 이를 두 언어로 전달하는 작업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에서는 한국어로 글을 쓰고, 링크드인(LinkedIn)에는 영어로 내용을 정리해 공유합니다. 그렇게 두 언어로, 두 개의 역사 속에서 하나의 진실을 말하는 게 저의 활동 방식입니다.
얼마 전에는 프라하에서 열린 자유주의 학생 포럼(Liberalism Student Forum)에 참석하고 돌아와서 그 경험과 느낀 점을 기고문으로 정리해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관련 기고 - 자유는 억압의 사슬을 끊는 것이다 (Libertarianism as Abolitionism)
https://m.blog.naver.com/freedom88-/223852804657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