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은, '김정일 모교' 만경대혁명학원 방문 "더한 역경도 승리"
북한 김정은이 설립 75주년을 맞은 북한의 엘리트 교육기관 만경대혁명학원과 강반석혁명학원을 방문했다. 김정은은 지난 2022년 10월12일 만경대혁명학원에서 열린 만경대혁명학원·강반석혁명학원 창립 7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기념연설을 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다음날인 13일 보도했다.(사진=연합뉴스)
얼마 전 개성공단에서 사업을 했었다는 한 기업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북한이 문만 열면 당장 북으로 들어가서 기업을 차리겠다고 흥분해서 말한다.
내가 “북한 노동당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는 들어가면 안 된다.” 고 말했지만 그는 북한이 문만 열어주면 괜찮다고 아는 척을 한다. 한국의 기업인들이 북한과 중국에게 그렇게 당하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기에 이 글을 쓴다.
1980년대 북한 정권은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서 북한 경제를 살려볼 목적으로 개혁개방 하는척 쇼를 하며 중앙에 “합영공업부”도 신설하고 외국기업들을 불러들었다. 여기에 속은 조총련 기업들과 중국 조선족들이 북한의 싼 노동력을 노리고 투자를 했다.
그 중에는 재미교포 김찬구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평양에서 북한의 경공업상이며 부총리인 김복신도 만났고 김정일의 동생 김경희도 만나서 북한 경공업 분야에 투자를 허가받았다.
김찬구는 수산업과 신발 분야에도 투자했고 인형 봉제 공장에도 투자했다. 즉 인형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자재와 기계설비는 김찬구가 대고 북한은 공장 건물과 노동력,전기,물 등 을 대는 조건으로 “완구생산 협동조합” 이라는 합영회사를 만들었다. 북측은 생산만 하고 상품 처리는 김찬구가 맡았다.
그렇게 평양시에 새로운 인형 봉제공장이 섰고 노동자들을 모집해서 북한 측은 인형을 만들었다. 그 인형들은 개당 평균 0,5 달러씩 받고 계약 상대인 김찬구에게 넘겨주었다. 김찬구는 인형을 일본으로 수출했다.
바로 그 합영회사의 북한측 사장이 나의 대학 선배였다. 그 공장의 인기는 처음부터 대단했다. 물론 인형 한개 당 가격은 적었지만 50명 정도의 재봉공들이 한 달에 벌어들이는 외화가 4-5만 달러에 달했다. 돈을 더 많이 벌수도 있었지만 일본의 주문량은 제한되었다.
물론 한국인들은 4-5만 달러를 대수롭지 않게 볼 것이다. 그러나 30여 년 전인 1990년대 말의 북한에서는 큰 성과였다. 그 당시 중앙의 책임지도원이었던 나의 한 달 노임이 1,3달러 정도인 250원이었으니 더 말해 뭐하겠는가.
합영공장 노동자들은 아무리 외화를 많이 벌어도 그들에게 차례지는 노임은 0,7달라 정도의 북한 돈이 전부였다. 북한 경제가 완전히 멎어서 돌아가는 공장이 없는데 그래도 합영공장 노동자들은 적은 노임이라도 받는 것에 감사했다.
그런데다가 합영회사 측이 명절 때마다 노동자들에게 기름과 당과류를 비롯한 적지 않은 상품들을 무상으로 나누어주었다. 그래서 합영공장에 입직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소망이었다.
그러나 김정일이는 합영회사들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겼다. 김정일은 합영회사들이 많이 생겨나면서부터 북한 인민들 속에 자본주의가 싹트고 일심단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면서 합영회사들을 정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보위부와 검찰은 모든 합영회사들을 덮쳤다. 자그마한 단서라도 잡으면 사장은 무조건 구속하고 회사는 해산시켰다.
바로 인형 봉제 합영회사 사장도 1999년 말 어느 날 아침에 출근 하였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의 죄는 이상했다. 북한에서 한 개당 0,5달러씩 받고 수출한 인형이 일본 상점들에서는 개당 5-6달러에 팔린다며 사장이 뇌물을 받고 싸게 수출했다며 반역죄를 씌웠다.
그가 아무리 인형에 관세도 붙을 것이고 또 일본은 원자재와 보조 자재비 그리고 인건비가 비싸기 때문에 개당 원가가 높을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
사장의 집을 수색했으나 달러는 찾지도 못했고 뇌물을 받은 증거도 없었지만 그는 6개월 이상을 취조 받다가 페인이 되서야 출옥하여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그 찰나에 미국에 갔던 대방 사장 김찬구는 다시 평양으로 들어가려고 베이징에서 입국사증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아무 이유도 없이 김찬구의 입국사증은 영원히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재미교포 김찬구의 16년간에 걸치는 북한과의 합영, 합작은 막을 내렸다. 그가 북한에 투자했던 백 수십만 달러의 돈은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
그 당시 거의 모든 합영 합자회사들이 그렇게 문을 닫고 쫓겨났다. 내가 북한 측 사장으로 있었던 “은성 합영회사”의 중국측 사장이었던 백성룡은 1996년에 자기 돈을 찾겠다며 북한에 들어가서 항의를 하다가 보위부에 잡혀가서 간첩 혐의를 쓰고 총살당했다.
북한은 그렇게 수많은 외국 기업가들의 돈과 원자재와 설비와 기술까지 공자로 먹어버렸다. 중국도 같다. 그러나 그 어디에 하소연 할 곳도 없었다.
내가 한국에 와서 보니 그 재미교포 김찬구 선생은 “아! 평양아” 라는 책을 써서 북한의 실상을 상세히 회고 했더라. 내가 그 책을 보고 서울에 와 있던 김찬구 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그 후 그와 서울의 한 식당에서 만나 맥주 한잔을 마시며 인형 합영회사 북한 측 사장 김명선이 잡혀간 사실을 알려주니까 깜짝 놀라더라.
한국 국민들이 공산국가에 대해서는 어떤 미련도 가지지 말기를 바라며 긴 글을 마친다.
2025.06.04
김태산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