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사전 모의한 것으로 보이는 문건에서 제주4·3을 법적 근거도 없이 '폭동'이라고 명시해 제주 지역사회에서 반발이 일고 있다.
9일 추미애 국회의원(국방위원회, 더불어민주당 하남시갑)에 따르면 12·3 계엄사령부의 '계엄사-합수본부 운영 참고 자료'에는 비상계엄 선포사례로 '제주폭동'과 '48. 여수·순천반란(여수·순천)', '부산소요사태', '79. 10·26사태(전국)' 등을 들었다.
추 의원은 이 문건이 지난 11월 여인형 국군방첩사령관의 지시로 방첩사 비서실에서 작성돼 정부와 군이 계엄 선포를 사전에 모의한 정황이라고 폭로했다.
이 문건에서 지칭한 제주폭동은 제주4·3을 말하는 것이다. 제주에만 내려졌던 비상계엄은 제주4·3 당시인 1948년 발효된 국내 최초의 계엄뿐이기 때문이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는 이날 성명을 내 "전두환 신군부 시절 작성한 문건인가? 이 문서는 여전히 대한민국의 군부가 제주4·3을 비롯해 한국 현대사를 얼마나 왜곡 편향되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는 증거"라고 비판했다.
김창후 제주4·3연구소 소장은 이와 관련 "2003년 정부 진상조사보고서와 제주4·3특별법 등에서 제주4·3이 폭동이 아닌 점이 이미 증명됐다"며 "왜곡된 시선을 그대로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김 소장은 이어 "현재 정부가 국가폭력을 인정해 보상해주고 있고, 검찰도 당시 군사재판의 불법성을 인정해 수형인의 무죄 판결을 끌어낼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강조했다.
제주4·3 당시 가족을 잃은 한 유족은 "계엄령이라고 하면 덜컥 겁부터 나는 등 지금도 제주도민의 가슴에 깊은 상처로 새겨졌다"며 "계엄령을 죽음과 체념의 상징처럼 여기고 있는데 이번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으로 생존 피해자와 유족들이 당시 상처가 떠올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고 말했다.
제주4·3특별법에는 제주4·3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했다.
이 문건의 예시인 1948년 제주 계엄령은 계엄령 자체의 불법성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정부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는 1948년 11월 7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제주에 내려진 비상 계엄령은 '계엄법 제정 전 이뤄진 계엄령'으로 불법성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했다.
더불어 학계와 정치권에서도 당시 계엄령이 불법이라는 연구와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사법 기관 역시 계엄령에 의한 군사재판을 불법으로 보고 당시 수형인들에 대한 재심에서 잇따라 무죄를 선고했다.
또 2001년 대법원은 불법성 논란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불법성을 제기한 언론에 대해서도 법적 책임을 묻지 않았다.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사건)을 반란으로 적시한 데 대한 반발도 나왔다.
여순 10·19 항쟁 총연합회 박선호 상임대표는 "정의, 시대 흐름은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다"며 "그런(반란이라는) 억지를 부리니 이런(비상 계엄) 일이 생기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박 대표는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고, 정리되지 않으면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며 "후손들에게는 아픔, 억울함이 없는 세상,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남도 여순사건지원단 관계자는 반란이라는 표현은 여야 합의로 만든 특별법 자체를 부정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여수·순천 10·19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여순사건법)에서 여순사건은 정부 수립 초기 단계에 여수에서 주둔하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인한 것이라고 명시했다.
1948년 10월 19일부터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1955년 4월 1일까지 여수와 순천을 비롯해 전남, 전북, 경남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혼란과 무력 충돌, 이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최근 일부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반란과 관련한 표현이 실렸다가 삭제되기도 했다.
(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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