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인권 침해는 국제사회의 심각한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정치범 수용소와 보위부 예심처에서 자행되는 비인간적인 처우와 고문은 인간의 기본 권리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이번 기사에서는 북한 보위부 감금 피해자 이선옥 씨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북한 내부의 충격적인 실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선옥 씨의 증언은 김영호 씨 가족의 비극적인 운명, 17살 순미의 눈물, 그리고 예심처 구류장에서의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다루며, 북한의 인권 유린 현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1. 북한에서 '죄 아닌 죄'로 형벌을 받은 가족의 이야기: 억울한 운명에 울부짖다
지난 2012년 4월 함경북도 보위부 예심처에서 열린 재판에서 김영호 씨와 그의 가족들은 북한 형법 제63조 '조국반역죄'로 처벌받아 정치범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김영호 씨를 포함한 일가족 9명이 체포된 이유는 단 하나, 북한을 벗어나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향은 함경북도 연사군 ○○리였지만, 김영호 씨는 평생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었고, 그곳에서 그와 그의 가족은 북한 형법 아래 신음하며 억울하게 처벌을 받았다.
▶ 김영호의 탈북 결심과 비극의 시작
김영호 씨는 북한 사회의 비극적이고도 비인간적인 현실을 체감하며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의 탈북 결심에는 처가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이 있었다. 처가에서 키우던 부림소가 그의 장모의 배를 뿔로 가격하여 간이 파열되었고, 급히 군병원으로 이송하려 했으나 이동 수단이 없어 수레에 실어 갔다. 그러나 병원으로 가는 도중 장모는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장모를 잃은 슬픔에 김영호 씨는 이성을 잃고 부림소를 죽였으나, 이는 북한 법에서는 엄연한 범죄로 간주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게 되었다. 그는 장모의 장례식도 지내지 못했고, 갓 태어난 딸도 남겨둔 채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 생계를 책임진 가장의 부재로 인한 고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김영호 씨가 감옥에 갇히며 그의 가족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가난과 고통 속에 놓이게 되었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고작 2년이었지만, 그 시간은 그들에게 있어 생과 사를 오가는 고난의 시간이었다. 김영호 씨는 출소 후 북한 사회의 불합리한 형법과 처벌 제도에 환멸을 느꼈고, 결국 탈북을 결심했다.
▶ 탈북의 길과 더 깊어진 비극
김영호 씨의 처제 김은하 씨(당시 20세)는 어머니를 잃고 형부마저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극도의 가난과 고통 속에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형부의 탈북에 합류했다.
하지만 그들이 탈북을 시도하던 중 북한 보위부에 체포되었고, 결국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내몰렸다. 김은하 씨는 "왜 우리 가족이 이런 운명에 빠져야 하는지, 마치 꿈이라면 좋겠다"며 눈물 짓던 모습이 가슴에 남아 있다.
2. 17살 순미의 눈물: 조국반역죄로 파멸된 한 가족의 이야기
지난 2011년 12월,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17세 김순미와 그녀의 엄마, 이모는 북한의 형법 제63조 '조국반역죄'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평생 나오지 못할 정치범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들의 죄목은 단 하나, 탈북을 꿈꾸며 자유를 향해 발을 내딛으려 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 그들은 집 문턱조차 넘지 못한 채, 단지 ‘구두 약속’만으로 이루어진 미수에 그친 계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조국반역자’로 몰아세웠다.
▶ 탈북을 꿈꾼 김순미와 그 가족들
순미는 온성군에서 17년을 살아온 평범한 소녀였다. 그녀의 엄마는 학생소년회관에서 1바이올린으로 이름난 외동딸 순미의 미래를 위해 탈북을 결심했다. 순미의 이종사촌 오빠인 이모 씨는 이미 한국에 도착해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고, 어머니와 아내에게도 탈북을 권유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모 씨의 아내가 시모와 시이모에게 탈북 계획을 알리고, 순미의 엄마 역시 딸과 함께 한국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가족 간의 탈북 계획은 처참히 깨지고 말았다. 이모 씨의 아내가 보위부에 자진신고를 하면서, 순미와 그녀의 엄마, 이모는 탈북을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온성군 보위부에 체포되었다. 이후 이들은 6개월간 고된 조사를 받았고, 함경북도 보위부 예심처에 이송된 뒤 3개월간의 예심을 거쳐 '조국반역죄'라는 무거운 죄목을 받고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 소녀에게 내려진 가혹한 형벌
김순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미성년자였다. 공민증조차 발급받지 못한 나이였지만, 그녀는 엄마와 이모와 동일한 죄명으로 동일한 형기를 받아야 했다. 그녀는 낯선 구류장에 갇혀 어둡고 차가운 감방에서 생애 첫 고통을 겪었다. 바로 옆 감방에서는 엄마가 계호원들에게 호된 질책을 받는 소리와 이모가 심장 발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어린 순미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가족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3. 지옥 같은 북한 예심처 구류장에서 보낸 날들: 살아남은 자의 증언
북한 함경북도 보위부 예심처, 이곳은 자유로운 세상과 단절된 마지막 문턱이자 ‘예비지옥’으로 불리는 장소다.
이곳에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은 '조국반역죄'라는 죄명으로 평생 자유를 박탈당하고 정치범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들은 단지 생존을 위해 식량을 구하러 탈북을 시도한 평범한 부모와 노인들, 혹은 그들을 도우려 했던 이들일 뿐이었다.
▶ 예심처에 갇힌 사람들의 비극
2010년부터 2012년까지 함경북도 보위부 예심처에 구금되어 조사를 받던 당시, 매년 80명에서 많게는 100명 이상의 주민이 조국반역죄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들의 혐의는 대부분 한국으로의 탈북 시도, 혹은 한국과의 전화 연락으로 인한 간첩 혐의였다.
정치범수용소로 이송된 이들은 자유를 꿈꾸던 평범한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가족의 생존을 위해 한국으로 가려 했거나, 혹은 탈북자들과 연락을 유지하고자 했을 뿐이었지만, 이는 북한 법에 의해 무거운 반역죄로 간주되었다. 예심처에서는 이들에게 가혹한 조사와 고문이 이루어졌고,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져 평생을 노역에 갇히게 되었다.
보위부 예심처에 들어온 사람들은 누구도 살아서 다시 세상에 나갈 가능성이 없다. 예심과 검찰국의 절차를 거쳐 정치범수용소로 이송되기까지 1년에서 2년의 시간이 소요되며, 그 기간 동안 그들은 인권이라 부를 것도 없는 비참한 대우를 받는다. 이미 죄인으로 낙인 찍힌 그들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고, 누구 하나 그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 인간 이하의 대우와 무차별 폭력
이곳에서의 하루하루는 고통과 두려움 그 자체다. 예심처의 죄수들은 감방에서 매일같이 다른 죄수의 고통스런 비명과 울부짖음을 듣는다. 특히 예심 과정에서 죄를 부인하거나 불복하는 사람들에게는 극악무도한 폭행과 고문이 일상적으로 자행된다. 때로는 예심처장의 지시에 따라 특정 죄수는 24시간 내내 고문을 당하며, 식사라고 주어지는 양은 겨우 한 숟가락의 밥과 국물 한 숟가락뿐이다. 이런 고문과 학대는 죄수들이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만든다.
예심처장은 죄수를 향해 협박의 말을 쏟아냈다. “수용소에 가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갈 줄 아느냐? 여기서 썩어봐라. 얼마나 견딜지 두고 보자.” 이러한 폭언과 함께 계호원들은 창의적이라 할 만큼 가혹한 체벌을 고안해냈다. 죄수들은 계호원의 감정에 따라 고문을 당하며, 감식과 수면 부족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 ‘거꾸로 서기’, ‘무릎 꿇고 손을 머리 위로 올리기’ 같은 고통의 자세를 강요당했다. 어느 순간부터 고통도 느낄 수 없는, 영혼만 살아있는 상태가 되었다.
◆ 국제사회에 호소
북한 정권은 단순한 탈북 시도마저 무거운 반역죄로 규정하며 가족 간의 갈등을 악화시키고 있다.
남편의 탈북 권유를 따른 척하며 시모와 시이모를 보위부에 신고하여 가족 관계를 파괴하고 갈등을 조장한 김정은 정권의 죄를 국제사회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순미와 같은 무고한 북한 주민들이 처한 비극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이선옥 씨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보위부 예심처와 정치범수용소에서 고통 속에 죽어간 사람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무덤도 없는 이름 없는 자들로 묻혔다.
이들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것이야말로 북한의 인권 유린을 고발하고, 더 이상 이와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국제사회의 관심과 개입을 촉구하는 유일한 길이다.
김영호 씨와 그의 가족, 17살 순미와 같은 무고한 북한 주민들이 처한 비극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김정은과 그의 정권이 저지르는 인권유린의 책임을 묻고, 북한 주민들이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되찾을 수 있도록 국제사회의 관심과 개입을 촉구한다.
◆ 살아남은 자의 증언과 바램
북한 보위부 감금 피해자 이선옥 씨는 그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동료들의 부탁을 기억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고자 한다.
이선옥 씨는 그 비참한 현실을 알리며,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저는 그곳에서 보낸 날들을, 그리고 그들과 나눴던 약속을 증언할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그 끔찍한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같은 감방에 갇힌 동료들은 살아남아 가족들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들의 말을 전할 수 있음에, 그리고 그날의 지옥을 이겨내고 나와 이 비극적인 진실을 세상에 알릴 수 있음에 감사를 느낍니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 보위부 예심처와 정치범수용소에서 고통 속에 죽어간 사람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무덤도 없는 이름 없는 자들로 묻혔습니다. 그들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것이야말로 북한의 인권 유린을 고발하고, 더 이상 이와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국제사회의 관심과 개입을 촉구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강조했다.
끝으로 "국제사회는 김정은을 비롯한 가해자들을 반드시 법정에 세워야 합니다"라고 절규했다.
정리. 장세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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