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저항조직 백장미단 마지막 생존자 103세로 별세

- 유대인 학살·나치 고발 전단 배포하다 옥고…"자유의 영웅"

한강의 아침 승인 2023.03.12 00:33 의견 0
트라우테 라프렌츠의 1943년 모습. 위키미디어 커먼스 퍼블릭도메인


독일 나치 정권에 저항하는 운동을 펼친 '백장미단'의 마지막 생존자 트라우테 라프렌츠가 지난 6일(현지시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103세.

10일 AFP 통신과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백장미 재단과 라프렌츠의 아들인 마이클 페이지가 그가 별세했다고 밝혔다.

1942년 여름 뮌헨에서 젊은 학생들이 주축이 돼 활동을 시작한 백장미단은 전단을 배포하고 그라피티를 남겨 나치 정권에 대한 독일인들의 저항을 촉구했다.

이들은 전단에서 아리스토텔레스나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등을 인용하고 나치 정권의 범죄나 유대인 학살 등을 고발했다. 어둠을 틈타 거리에 "타도 히틀러"와 같은 슬로건을 그려넣기도 했다.

단원 수는 수십 명에 불과했고, 지도부가 1943년 2월 비밀경찰 게슈타포에 체포된 지 나흘 만에 참수형을 당하면서 1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활동하는 데 그쳤다.

백장미단 같은 비폭력 저항 조직을 잔혹하게 처단한 이같은 방식은 자국 내에서조차 반기의 기미만 보여도 무관용으로 대응한 나치의 성격을 드러낸다.

1919년 5월생인 라프렌츠는 함부르크 의대생 시절 백장미단을 결성한 알렉산더 슈모렐과 한스·소피 숄 남매를 만나 뮌헨으로 옮겨 갔으며 백장미단 활동 중에는 전단을 나르고 잉크와 종이, 봉투를 확보하는 역할을 맡았다.

뮌헨대 건물 앞 거리에 있는 백장미단 추모석. 연합뉴스


숄 남매 등 백장미단 지도부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고 난 다음 달인 1943년 3월 라프렌츠도 체포됐다. 당시 히틀러가 단두대 처형을 재개하도록 명령하면서 독일에서 5천명가량이 참수형을 당했다.

생전 소피 숄의 모습은 나치에 저항한 독일인의 상징으로 남아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학교나 거리가 수백 곳에 달한다.

라프렌츠는 1년 복역 후 석방됐으나 곧 다시 체포되는 등 1945년 4월 독일이 패전할 때까지 경찰 조사를 받거나 감옥을 들락날락 하는 삶을 이어 갔다.

1947년 미국으로 이주해 의학 공부를 마쳤으며 안과의사인 버넌 페이지와 결혼해 네 자녀를 뒀다. 20여 년간 에스페란자 특수학교의 교장을 맡았고 인지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

100세 생일에 독일 정부로부터 공로 훈장을 받은 라프렌츠. 독일 외무부 트위터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2019년 5월 3일 라프렌츠의 100세 생일에 그에게 공로 훈장을 수여했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당시 라프렌츠를 "국가사회주의의 범죄에 맞서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독재와 유대인 학살에 저항하는 용기를 지닌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라며 "자유와 인류애의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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